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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와 삶에 관하여

토종한국인, 코로나 속에서 유학(?)하면서 느낀 것

by Hi Sophia 2021. 2. 20.

불금은 불금.

딱 불금에 맞춰 슬럼프가 왔다. 자그마치 일주일만의 슬럼프. 그나마 불타는 금요일 시간대에 맞춰 현타가 와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평일 한중간에 그것이 오면 참 버티기 힘들지 않은가.

나는 토종 한국인 대학원 유학생이다.

사실 나를 지칭하는 말은 매우 많다. 나는 퇴사자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경력자다. 나는 한 사람의 wife다...

내가 짓지 않은, 세상이 지어준 나의 또다른 이름들로 요즘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소개해보겠다.

 

나는 토종 한국인이다.

나는 한국에서 초, 중, 고, 대학교까지 모두 졸업한, 일명 '토종 한국인'이다. 모든 교육과정을 한국어로 배웠고, 관심 있는 책도 한국어로 읽었으며, 가족이나 친구들과 한국어로'만' 대화한다. 물건을 살 때도 한국어로 주문하고, 꿈도 한국어로 꾼다.

그런 내가 영어로 가득한 세상에 들어왔다.

'토종 한국인'이란 용어는 주로 영어에 관해 이야기할 때 쓴다. 나는 이 곳에서 '너는 어디에서 살다 왔니?' 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서울, 경기도, 제주... 나도 나름 여기저기서 살다왔는데^^ 이 곳 사람들은 '국가'나 '대륙' 단위로 말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초중고를 다 나왔다, 중동에서 20여년을 살다 왔다, 미국, 중국... 모두가 '어디선가' 살다 온 듯한 이 곳에서 나만 이방인마냥 한 국가를 떠나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나는 수많은 외국인들과, 외국에서 살다온 한국인들 틈바구니에서 공부하고 있다. 모든 것을 영어로! 수업도 영어로, 교재도 영어로, 과제도 영어로, 시험도 영어로.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실생활을 하는 건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정말 다른 일이다. 이 곳에서 지내며 느낀 점 몇 가지가 있다.

 

1. 영어를 못하는 게 창피하다?

처음에는 영어를 주위 사람들보다 못하는 게 창피했다. 최대한 잘하는 척 하려고 했다. 자연스러운 척... 부족한 영어실력은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영어를 못하는 게 과연 창피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토종 한국인인 우리들에게 영어란, 오랜세월동안 '공부'였다. 수능 영어성적, 영어 중간고사, 토익 점수, 스피킹 점수... 영어는 언어라기 보다 우리에겐 공부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라, 라는 의식을 주입받고 살았으니 공부를 못하는 것 혹은 상식이 부족한 것 등은 창피한 일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공부'로 인식하고 있는 영어를 못하는 것 역시 무의식적으로 창피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영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를 못하는 것을 창피해할까?

내가 여기에서 만난 한 한국인은 학창시절을 모두 외국에서 보내고 한국에 들어온 지 5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외모나 일상대화를 할 때 그는 누가 봐도 한국인이다. 그가 말했다. '나도 공공기관 같은 데 가고싶긴 했었는데, 거기는 NCS인가 그런 시험을 본다며? 난 한국어로 그렇게 빨리 읽으면서 문제푸는거 생각조차 안해봤어. 절대 못해.'

그 말이 내겐 충격이었다. 아! 그렇지! 영어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사람이 한국어로 된 시험을 보거나 한국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어렵겠구나!

그동안 단 한번도 거꾸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흥미로웠다. 한국에는 이상하게도 영어를 잘하면 '우와' 하고 쳐다보는 희안한 문화가 있는데, 따지고보면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던 사람은 다른 언어에 비교적 취약할 수밖에 없다. 원더걸스의 혜림도 다국어를 한다는 이유로 '엄친딸', '엘리트' 등으로 불릴 때마다 진짜 자신이 들통날까봐 부담이 됐다고 고백한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날 이후 나는 '영어를 잘 못함 = 창피함'의 공식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틀린 영어도 자신있게 내뱉기 시작했다. 의미만 잘 전달되면 되는 거지, 뭐.

 

2. 남들보다 느려서 서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어로 공부를 하고, 영어로 일을 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무작정 뛰어들었다. 그러면 하는 수없이 영어를 잘 해야 한다. 여기에선 더이상 나의 백그라운드에 의한 위로가 통하지 않는다.

'토종 한국인인데 영어실력이 그 정도면 대단하네.'

'쭉 한국에서만 살았는데 영어 공부를 어떻게 했어요?'

라는 말들이 더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건 영어를 제 2외국어로 사용할 때나 기분 좋은 말이다. 이제 내게 영어는 생존문제가 되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어야 하고, 수업을 이해해야 하고, 내 생각을 말해야하고, 글로 써야한다. 못하면 도태된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 느려서 시간을 많이 투자하게 되는 것은 괜찮다. 그정도쯤은 각오했다. 그런데 '많이 느린 것'은 곧 '미완료'로 이어진다. 즉, 시간을 충분히 투자했는데도 진행속도가 너무 느려서 과제를 완료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 속상한 것은, 나도 모르게 남들과 비교되어 내 자신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여지껏 나는 '남들과 비교하는 일'과는 동떨어져 살아왔다. 워낙 남에게 관심이 없기도 했고, 남들과 비교할 것도 비교하지 않을만큼 자존감이 높기도 했다. 상대적인 것보다는 늘 절대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다. 학창시절 반에서 1등을 했을 때에도 그저 공부가 재밌어서 한 것일 뿐 등수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얘기를 안 하니 사람들은 2등한 친구가 1등을 한 것으로 한동안 잘못 알고있기도 했다. 대학교 때는 워낙 하고싶은대로 하고 지내서인지 '자유인'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친구들은 내 행동들에, 내 이름을 따 ㅇㅇ롭다. ㅇㅇ스럽다. 라는 코멘트를 달아주곤 했다. 직장에 다닐 때에도 '남들처럼', '남들이 하니까' 라는 말이 제일 싫었다.

그랬던 내가, 남들과 비교되는 위기를 맞이했다.

하루는 내가 정말 잘 해내고 싶은 과목의 리딩을 약 7~8시간을 들여 도전해보았으나 참패했다. 리딩 총 2편 중 2편 모두 반도 못 읽었다. 가까스로 핵심문장같아 보이는 몇몇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 뿐.... 그러다 수업시간이 다가왔다. 수업에 들어가기 직전 우연히 만난 같은 수업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2시간도 안되어서 다 읽었다고 한다.^^ 그럼 대충 skimming 하고 모든 문장을 다 읽지는 않은건가? 다시 물어보니, 소설책 읽듯이 한 문장 한 문장 다 읽었다 한다.^^ 왓더..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이는 건, 다시 말하지만, 괜찮다. 각오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나는 다 못 끝내고 그들은 끝낸다! 석사과정생임에도 불구하고 한 학기에 4과목씩 듣고 있기에, 내게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세월아 네월아 일주일을 다 들여서라도 리딩을 어떻게든 완료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다른 과목 과제도 하다보면 각 과목당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버리기 마련이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시간을 짜내고 짜내어 7~8시간이나 투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겨우 반도 못 읽었다고?

남들보다 거의 4배 가까이 시간을 투자했는데 리딩과제를 완료하지도 못했다고?

내가 또 열심이 안하는 거면 몰라. 남들보다 느려서 정말이지 무지 서러웠다.

게다가, 리딩에 shortcut은 없다고, 많이 읽다보면 6개월에서 1년 정도 지나면 는다고 하던데, 그러면 나 이미 졸업이다... 이것도 서럽다.

 

3. 언어가 바뀌면 성격도 바뀐다?

첫 수업시간에는 말을 한 마디도 못했다. 단 한 마디도.

그 이후에는 잘했겠는가? 아니. 계속 못했다.

어느 날은 토론 비중이 높은 수업에 수업준비를 아주 열심히 해 갔는데, 말을 한 마디도 못해서 수업 준비를 전혀 안 해온 다른 학생들과 싸잡아서(?) 혼난 적이 있다. 그 대상에 낀 것이 무척이나 억울하고 속상해서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나 이렇게 이렇게 수업 준비를 했고, 영어로 공부하는 것이 느리기에 시간을 배로 투자했다. 그런데 막상 수업이 시작되면 말을 한 마디도 못하겠다. 말하려고 용기를 내서 말할 문장을 머릿속으로 조합하고 있으면 이미 다음주제로 넘어가버리기도 일쑤다. 정말 속상하다...'

어디서나 밝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살아왔던 내가 한 순간 말 없고 소극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나는 퇴사자다. 아니, 경력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나만의 강점이 있을거라 확신한다.

나는 공공기관 퇴사자다. 가끔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좋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와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경력자로서, 내게도 분명 다른 이들과 다른 차별점, 나만의 관점이 있을 거라 믿는다.

그것을 계발하고 살리는 것이 내가 살 길이라 생각한다.

(<나는 퇴사자다.>편은 다음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룸...)

 

나는 대학원생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온라인 수업 중이라는 것이다.

온라인 수업은 여러모로 내게 좋다.

첫째, 영어가 서툰 나는 온라인 수업을 들은 뒤 학교에서 제공하는 녹화본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

영어 수업을 처음 듣기 시작했을 때에는 수업내용도 내용이지만, 과제나 시험 관련해서 하는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이 때 녹화본이 유용했다. 다시 듣고, 또 다시 들으면 안 들렸던 내용이 들리기도 한다.

둘째, 스피킹 실력이 부족해도 컨닝(?)하며 말할 수 있다.

이건 내가 자주 쓰는 수법(?)인데, 수업시간 중 토론이나 참여를 해야 할 때 내 실력으로는 바로바로 영어가 나오지 않으니 문장이나 키워드를 빠르게 메모한 뒤 그것을 슬쩍슬쩍 보면서 말한다. 그러면 최소한 말을 하다가 뚝...뚝... 끊겨서 얼굴이 빨개지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다.

그렇게 수업을 듣는 것에 겨우 적응했더니, 이제는 영어논문이 나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영. 어. 논. 문.

영어 소설책도 안 읽어본 내게 영어논문이라니. 

(다음 편에 계속)